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카미네 히데코 (문단 편집) === 10명의 깃발모임 대표시절 === 이 시절을 설명하자면 빠질 수 없는게 [[도호]]영화사 노동조합 파업사건인데 이 사건은 아직까지 일본 노동조합 파업역사상 최대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된다. 히데코는 일본 패전 이후 8개월만에 “명랑한 여자(陽気な女,1946년,사에키 키요시 감독) 주연으로 영화에 복귀하는데 이시기는 도호영화사 노동조합이 1948년까지 4번의 파업을 일으켜 일본 영화계를 넘어 일본 노동계가 시끌벅적한 시기. 당시 도호영화사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5600여명이었으며 이정도 규모의 노조라면 당시 일본의 어떤 노동조합규모와 견주어 보더라도 대단한 세력이었다.[* 파업의 규모와 강도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1948년도에 발생한 3차 파업은 참가규모가 꽤 커서 일본 경찰(당시엔 경시청 예비대)이 출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육군제1기병사단 소속 1개 소대와 장갑차,전차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파업강도가 극심했다. 이들 파업가담자들은 도쿄의 도호영화사 스튜디오 및 촬영세트 전부를 점거하고 격렬히 저항하다 겨우 진압되었다. 이과정에서 양측의 피해도 극심했으며 이후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 군정당국은 일본의 노동세력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 3월 1차 파업은 노조,사측이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지만 10월의 2차 파업부터는 여파가 심상찮게 몰려들었다. 노조의 다양한 요구로 인해 사측이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도호의 모든 영화촬영현장이 올스톱되었으며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영화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현장이 엉망인 상태로 멈춰서니 도호소속 연기자들의 불안감은 가중되었으며, 평소 도호에 불만이 큰 배우들도 이번 기회에 이적이나 독립을 모색해 보는 등 [[도호]]영화사 내부는 혼란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1946년 11월, “파업에는 반대하지만 도호 사측에도 찬성하지 않는다”라는 폭탄선언을 한 도호의 간판 배우 오코치 덴지로의 성명을 필두로 타카미네 히데코, [[하라 세츠코]], 야마네 히사코, 하세가와 카즈오, 이리에 타카코, 야마다 이스즈 등 도호소속 10명의 배우들이 도호영화사와의 계약해지 및 독립선언을 하여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결정을 내린다. 이 10명의 배우들은 비단 [[도호]]뿐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 연예계에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탑 배우들이라 파장은 엄청났었다. 당시 일본 언론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이 10명의 배우들을 “10명의 깃발모임”이라고 이름붙였는데 이 10명의 깃발모임에 속한 일부 배우들은 이 작명에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는 후문도 있다.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이 10명중 가장 나이가 어렸으며 인기나 인지도를 봐도 대표격이었다.[* 사실 이 10명의 배우들은 하라 세츠코가 얼굴마담 역할을 해주길 바랬으나 하라 세츠코가 언론에 나설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며 그나마 다카미네 히데코가 젊은 나이에 할 말은 하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이런 보도가 나온 배경이기도 했다.]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파업의 영향으로 여러가지 불만이 쌓여가던 중이었지만 [[도호]]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쁠게 없었다고 한다. 그런 히데코가 도호를 나올 생각을 한 이유는 영화 “파계(破戒)의 출연무산이 결정적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영화 “파계”는 일본의 대문호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것인데 1945년에 도호가 판권을 구입하고 감독을 아베 유타카로 선정했다. 주연배우는 다카미네 히데코로 이미 캐스팅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초기 촬영에 들어간 상태에서 파업의 여파로 촬영이 중단된 것이다. 당시 히데코는 이 영화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는 후문이었는데 캐스팅이 엎어지는 것도 아닌 제작이 중단되기까지 하고 파업으로 도저히 영화제작이 계속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호]]영화사가 이 영화제작의 권리를 중간에 [[쇼치쿠]]에게 넘겨버렸는데 다카미네 히데코는 더욱 더 도호영화사 사측의 처사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영화제작권리를 영화사끼리 거래하는 것은 당시 일본 영화업계에서는 그닥 큰일이 아니었는데 문제는 제작중인 영화, 그것도 주연배우 캐스팅이 끝나있는 데다 촬영이 시작되어 버린 영화를 중간에 다른 영화사에게 팔아버린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쇼치쿠로 넘어간 영화 “파계”는 배우들이 전면 교체되고 대본도 수정되어 제작 완성되었는데 이 영화에서 다카미네 히데코가 맡을려고 했는 역을 신인 여배우 가츠라기 요코[*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초상” 작품에서 데뷔했다.]가 맡아 눈부신 연기를 펼치며 일약 대스타로 등극하게 되며 다카미네 히데코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쇼치쿠]]는 영화 “파계”의 권리를 인수받아 [[기노시타 케이스케]]에게 감독을 맡긴다. 기노시타 감독은 난처해하다 감독직을 수락하고 영화를 완성했는데 역시나 기노시타 감독답게 흥행에도 성공했다. 다카미네 히데코 입장에서는 더욱 더 기분이 상했을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영화로 [[기노시타]] 감독은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을 수상한다.] [[도호]]와의 계약해지 이후 다카미네 히데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10명의 깃발모임의 수장격이 되어 도호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수괴(?)같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지만 히데코를 비롯한 이들 10명은 다른 도호 탈퇴자들을 규합해 신도호(新東宝) 영화제작소[* 1년뒤 주식회사로 정관변경 및 신도호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신고, 이때 도호를 탈퇴하고 신도호에 합류한 배우들이 100여명이 넘었다고 하니 도호는 직격탄을 맞았고 휘청였다. 오늘날 도호의 위상을 생각하면 당시는 도호의 명운이 걸린 절대절명의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듯.]를 창립하고 회사의 초대 전속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신도호의 창립으로 인해 당시 5개 회사로 나뉘어있던 일본영화업계는 6개로 재편되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처음 신도호에서의 히데코의 행보는 순풍을 타는 듯 했으나 이후 [[하라 세츠코]]를 비롯한 10명의 깃발모임 소속 배우들이 잇달아 신도호를 이탈해 프리를 선언하거나 [[쇼치쿠]], [[토에이]]로 이적을 하면서, 신도호도 위기를 맞게 되지만 다카미네 히데코만은 계속 신도호를 지키며 활동을 계속하다 인생 최대의 스캔들을 맞으며 신도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도호]]를 탈퇴하던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를 위한 공식 팬클럽 같은 “공식 후원회”라는 단체가 발족했는데, 일본 연예계에서는 당시 팬클럽이 정식단체 신고까지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정도로 다카미네 히데코의 인기와 이 단체의 규모가 대단했던지 월간지까지 발행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월간지 이름은 히데코의 이름에서 따온 “DECO”. 사단은 1950년 당시 결혼을 전제로 교제해 오던 연인이 신도호 회사의 임원(당시 신호도의 이사직함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이 원인으로 이 인물은 공식 후원회의 공금을 유용하고 이것도 모자라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고 있었다는 게 언론을 통해 공개되자 히데코는 충격을 받고 신도호와의 계약해지 및 프리선언을 한다. 이 모든 수많은 일들이 일본 패망 이후 단 5년간에 히데코에게 일어난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